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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백-파수꾼] 존재의 상징성, 상징의 연결고리, 극의 연극적 장치

by hansan671 2025. 4. 14.

이강백의 대표 희곡『파수꾼』은 한국 현대 희곡사에서 매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단순한 연극을 넘어선 이 작품은 상징과 은유를 통해 시대적 억압, 인간 존재의 본질,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 등 다층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파수꾼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떠올리는 ‘지키는 사람’이라는 개념을 넘어서서, 지켜야 할 대상이 모호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혼란, 무의식적인 복종, 실존적 불안을 모두 상징한다. 1970년대의 사회 정치적 맥락 속에서 ‘파수꾼’이라는 인물은 매우 상징적인 캐릭터로 작용하며, 단지 극의 흐름을 이끄는 인물이 아닌 전체 극의 메시지를 함축하는 존재다. 본 리뷰에서는『파수꾼』 속 주요 상징 요소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하며, 그것이 어떻게 구조적 장치 및 시대 맥락과 연결되는지 살펴본다.

보안병


1.'파수꾼'이라는 존재의 상징성

『파수꾼』의 제목은 그 자체로 작품의 핵심 상징을 드러낸다. 파수꾼은 겉보기에는 책임감 있고 충직한 감시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는 자신이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조차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다. 명령은 있었지만 그 내용은 잊혔고, 상황은 바뀌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킨다. 이 불분명한 목적성과 정체성은 개인이 어떤 신념이나 목적 없이 살아가는 사회를 반영한다. 다시 말해, ‘파수꾼’은 사회가 강요한 정체성, 체제에 의해 부여된 임무, 그리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더불어 파수꾼의 존재는 실존적 물음을 유발한다. 그는 누구인가? 왜 이 자리에 있는가? 무엇을 위해 지키는가?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극 중 인물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을 바라보는 관객에게도 그대로 전해진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누구를,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이러한 의문은 이강백이 이 극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문제의식 중 하나다.

작품에서 파수꾼은 계속해서 기다린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희망이나 목적을 향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 무언가 올 것이다’라는 막연한 전제에 기반한 것이다. 이는 사무엘 베케트의『고도를 기다리며』와도 연결된다.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다림은 결국 인간의 삶 자체를 은유하는 것이며, 파수꾼이라는 인물은 그러한 허무한 삶의 상징적 구현체라 할 수 있다. 그는 육체적으로 존재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부재하며, 이는 곧 인간 존재의 분열성과 허구성을 드러낸다.


2.시대 배경과 상징의 연결고리

이강백은 『파수꾼』을 1970년대의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통제라는 배경 속에서 창작하였다. 당시 한국은 군사정권 하에 있었으며,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철저히 제한되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개인은 체제에 순응하거나, 체제에 의해 도태되는 양자택일의 길에 놓여 있었다. 『파수꾼』의 인물은 바로 이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특정한 ‘명령’을 지키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명령의 내용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이는 실제 당시 사회가 보여준 ‘의무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상징하며, 스스로가 왜 복종하고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은유한다. 체제가 개인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그 역할을 의심 없이 수행하게 만드는 구조적 폭력은『파수꾼』 속 현실의 중심 축이다.

또한, 파수꾼은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 이는 과거에 주어진 가치관이나 권력이 현재에도 그대로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명령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는 마치 좀비와 같다. 이강백은 바로 이 지점을 통해 과거의 권력 잔재와 사상적 통제가 현재의 인간 행동을 어떻게 지배하는지를 비판적으로 보여준다.

『파수꾼』은 시대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그 함축성과 은유는 당대 정치현실을 명확히 반영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시대의 기록이자, 저항의 연극이기도 하다. ‘무엇을 지키는가’라는 질문은 곧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가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으로 이어지며, 희곡은 관객에게 깊은 내적 반응을 유도한다.


3.극의 구조적 상징성과 연극적 장치

『파수꾼』은 극의 구조부터가 매우 상징적이다. 무대는 좁고 폐쇄적이며, 외부와의 연결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제한된 공간은 ‘갇힘’의 상징이자, 사회의 단절 구조를 표현한다. 인물들의 이동은 거의 없고, 행동은 반복된다. 이는 부조리극의 전형적인 형태이기도 하며, 이강백은 이를 통해 현실 세계의 반복성과 무기력을 연극적으로 형상화한다.

특히 반복되는 대사와 무의미한 행동은 ‘삶의 기계화’를 의미한다. 파수꾼은 명확한 목적 없이 자리를 지키고, 같은 행동을 되풀이한다. 이는 단지 직업으로서의 파수꾼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반복은 의미를 상실하게 하고, 그 속에서 인물들은 무력해진다. 이는 곧 관객에게 “우리 삶은 반복 속에서 무엇을 잃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무대 장치는 극의 메시지를 더욱 극대화한다. 예를 들어, 무대 조명은 때로 인물들을 고립시키며, 때로는 어둠 속에 묻히게 한다. 이 조명 연출은 파수꾼의 내면적 혼란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침묵과 정적 역시 중요한 장치다. 말이 멈춘 순간에 오히려 더 강한 의미가 발생하며, 그 사이의 공백은 관객이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극 전체에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 너머의 메시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결국 『파수꾼』의 구조는 단순한 극적 장치를 넘어서 하나의 철학적 장치이기도 하다. 이강백은 연극을 통해 사유하게 하고, 무대를 통해 사상과 감정을 전달한다. 관객은 극이 끝난 후에도 마음 속에서 계속 울리는 질문을 안고 돌아가게 된다. ‘나는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나는 왜 이 자리에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파수꾼에게 향한 것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향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힘이다.


결론


이강백의 『파수꾼』은 연극이라는 장르를 통해 사회의 모순과 인간 존재의 불안을 극대화하여 표현한 작품이다. 상징적 인물과 구조, 시대 배경과의 연결성, 반복과 침묵의 연출은 모두가 이 작품의 깊이를 더하는 요소다. 이강백은 단순히 이야기나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관객의 내면을 건드리는 질문을 제기한다. 『파수꾼』을 감상하는 것은 연극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철학적 행위가 된다. 지금 다시『파수꾼』을 읽어본다면, 당신은 어떤 ‘지켜야 할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